당신과 나 사이에 쌓인 눈처럼
아름드리 소복하게 쌓인 첫 눈처럼
너와 나의 사랑이란 그랬나보다,
같은 듯 다름에도 그렇게 사랑했다.
내가 좇던 사랑이란,
네가 찾던 사랑이 아니었나보다
네 가슴을 더듬으며 찾았던
그 사랑은 내가 그리던 사랑이 아니고
우리는 서로 다른 무언가를
서로에게 찾다 지쳐 쌓여갔나보다.
소복히 쌓인 서로의 어긋남이
첫 눈이 스르륵 밟히고 녹 듯
새하얗던 몸에 검은 때를 묻히고
오지도 않은 봄을 찾는 듯
아스팔트 사이로 몸을 감췄나보다.
그렇게 우린 서로를 잊어갔나보다.
첫 눈이 오던 날 널 떠나 보내고
되돌아온 내 자리에 네가 없듯이
첫 눈이 녹아내린 거리 속에서
설레이던 처음이란 찾을 수 없다.
사색하는 회색 빛깔의 겨울 나무에겐
발치에서 꿈틀대는 낙엽을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부르르르 떨다가도 금방 울어버릴 듯이
지 손목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성급히 갈색을 떨쳐버린 도시 풍경 속에서는
따스한 햇살마저 새하얗게 질려버린다.
그저 추위가 싫다 하여 널 찾는게 아니라
만연했던 붉은 빛깔이 그리워 네 모습 그린다고,
그런 그리움이 멈춰버린 심장을 뛰게 하고
찬 바람 눈치보며 움츠렸던 몸을 곧게 세우고
너 앉았던 작은 의자에서 네 외로움 줏어담아
지친 듯 내려앉은 네 한 숨에 함께 실어 보내리다.
무언가에 쫓기듯 내 손길을 뿌리친 네 모습엔
이 곳에 더 이상 널 그리며 쓰다듬을 것이 없음을
해가 뜨고 지듯 저 또한 갈 수 밖에 없음을
미리부터 일러주는 서글픈 몸짓이 있었다.
가리라, 갈 것이라 말해주지 못했던 너에게
원망하는 대신 그것은 애정이었다 말하고 싶다.
녹차 한 잔으로 찾아보려 했던
여유란 녀석은 온데간데 볼 수가 없고
어울릴 리 없는 담배 한 개피가
머리 속을 뱅글뱅글 헤집어놓고 다니니
이토록 안 맞는 앙상블이라 하며
달콤한 커피가 네 짝이 아니더냐 짖고
구토로 찌든 번화가 한 복판 마냥
지끈대는 머리가 곧 내가 아니냐 싶고
이대로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해
다가오는 퇴근시간 기다리다 지쳐버려
말문이 잠기고 당신은 다가오고
이 못난 한량에게도 어울리는 당신이라
미안해 멀쳐내려니 내가 힘들고
그대로 안아보니 이토록 두근대는 것이다.
아직은 달력이 가을냄새를 풍기고 있지만
떨구어진 낙엽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니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지난 밤에는 더워서 입지 않았던 외투인데
오늘 아침엔 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되고
바삐 움직이는 출근길 사람들 사이에서
매일처럼 느껴지던 혼잡한 열기를 볼 수가 없다.
하늘이 비추어 환히 빛나는 흐릿한 백색 도시에
활기를 비틀어 쥐어 짜낸 듯 신음만 난무하니
그 사이로 불어오는 칼처럼 날카로운 바람에
쉴 새 없이 베어지는 내 살갗은 쓸쓸하고
온 몸을 웅크리며 그리운 내 님 생각해봐도
발을 뻗어 나아갈 수록 더 멀어질 뿐인 것이라
아, 겨울이 와도 따스해질 것만 같았던 우리가
이 추위에 오히려 잔인하게 식는 것인가
멈춤없이 두근대는 나로 하여금 따스한 것은
오로지 두 볼을 타고 내리는 눈물 뿐인가 보다.
햄스터는 당분간 접고, 제 스스로를 투영할 이야깃거리를 하나 쓰고 싶어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금방 아실테지만 '소아' 는 절 투영하고 있구요. 제 성격이나 행동양식 등이 고스란히 묻어날 인물입니다.
이야기는 쉽게 말해 '성장' 을 시간적 메타포로 진행되며 나무는 커지고 소년은 나이를 먹습니다. 원래 '버드나무 소년' 이라고 제목을 지었었는데 소년이 나이를 먹게 되면 제목이 좀 뻘글이 될 것 같아서 바꿨어요. 대신 굉장히 무난해졌죠.(흔해빠진 '이야기' 따위라니...)
나무가 되고 싶어했던 소년은 현실의 풍파가 자신을 뿌리채 흔들고 마치 우박처럼 쏟아져 자신을 쥐어박으며 노쇄하게 만들면서 점차 이상주의에 빠진 자신이 현실을 이겨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낍니다. 버드나무는 그런 소아가 위안을 찾는 유일한 대상이죠.
"현실의 풍파" 는 지금의 현실을 투영할 것입니다. 풍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비웃고 헐뜯는 부분도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제 스스로를 위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전 비록 현실에 굴복할지라도, 소설 속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거든요. 소아는 에메랄드 빛 바람이 태양을 타고 흐르는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버드나무를 품에 안은 채 어떤 삶을 살아갈지 배웁니다. 나무처럼 곧고 아름다운 소아의 삶이 여러 사람을 만나고, 사건을 겪으면서 어떻게 흘러가는지가 이 소설의 주된 내용입니다.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구지 여기에 써놓을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필요 이상의 이야기를 써놓았으니까요. 여기 올라올 앞으로의 글들은 문법적으로 다소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몇 몇 표현들이 매끄럽지 못하거나 충분한 묘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은 막 작성한 다음 곧바로 올리기 때문임을 이해 바랄께요.
이야기 열기
버드나무가 한 철이라, 냇가엔
고운 물이 흐르고 봄 향기가 소년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냇가에서 막 건진 조약돌을 주워담아 어린 나무
몸통을 둘러놓는다. 소년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혔다.
“할아버지, 이 나무는 몇 살이예요?”
솜바람에 나부끼는 잡초들 사이로 흰 머리 무성한 노인네가 앉아있었다. 소년이 그랬듯 노인도 한 손에 자그마한 돌 조각을 쥐고는 이리 저리 매만지며 놀고 있었다.
“글쎄, 크기로 보아하니 올 봄이 처음 맞는 봄일지도 모르겠구나.”
소년은 이 한 살도 안된 움나무에 묘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시내가 흐르는 주변의 풍경에서 분명 그럴듯한 나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살 곳을 잘못 찾아왔을지도 모르는, 제 키보다도 작은 애기나무가 소년은 뭇내 안쓰럽게 느껴졌다.
“나무는 데려갈 수
없죠?” 소년의 말에, 노인은 금새 화색이 되어 껄껄거리며
웃었다. 어울릴 턱이 없는 표현이지만 분명 어린 손자의 입에서 나온 아름다운 시였다.
“옮겨 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집 마당엔 나무가 자랄만한 공간이 없구나. 네
아버지가 벌써 이런 저런 나무들을 옮겨놓았거든.”
채 마르지도 않은 잎사귀를 만지작거리던 소년은 실망한 듯 애써
모아놓은 돌멩이들을 다시 냇가로 던지기 시작했다.
“그럼, 여기 자주 올래요. 맨날 와도 되죠? 엄마도 밖에서 노는거 안 혼내시잖아요.”
“그 나무가 마음에
들었구나?”
“네, 이건 꼭 저 같아요. 절 닮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이름도 똑같이 지어줬어요.”
“앞으로 이곳에 오면
소아를 찾으면 되겠구나.”
노인은 손자의 이름을 가진 어린 버드나무를 쓰다듬듯 바라보았다. 맑은 물소리, 청명한 하늘에 초록빛 들판 사이로 소아의 미소를 보는
즐거움이 더해질 것만 같았다. 시냇가를 자주 오게 될 생각을 하니 아들의 어릴 적 모습이 떠올라 금새
흐뭇해지는 것이었다.
“소아야, 밥 먹어야지.” 앞치마에 묻은 물기가 마를 새도 없이 그녀는 막내
아들을 부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밥그릇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스함은 그녀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녀는 어서 자신의 가족들을 이 세계로 초대하고 싶었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한 행위라고 하기에는, 식사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특히 저녁시간엔 어김없이 찾아오는
온 가족의 식사시간은 절대 빠트려선 안 되는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밥을 먹는 필수적 행위와 더불어
가족 구성원들이 그 날 하루를 지낸 소감과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는 대화를 나누며 든든해지는 배를 두드리는 것이다.
비록 별다른 사건이 없더라도, 이 시간은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소아는 조금 지겹다고 생각했다. 6명이나 되는 식구가 꼭 좁은 식탁에 둘러앉아 뻔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자리였다. 사실 소아는 자신이 발견한 어여쁜 나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오묘함은 어린 소년이 느끼기엔 단지 불쾌할 뿐이었다.
“허허, 네놈은 오늘도 회사에서 혼구멍이 난게로구나?”
“어휴! 아버지, 혼구멍이라니요! 그냥
‘지적’ 받은 것 뿐이라구요.”
“그러게 왜 일 하다가
졸아서는… 쯧쯧쯧. 이 애비는 젊었을 적엔 하루에 세 시간씩
자고 공부하고, 일하고, 또 공부하고 그랬다.”
“전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거기다 얼마나 지루한데요. 차라리 일이 많으면
정신없이 할텐데, 뭐 일거리를 찾아다녀도 야근할 거리도 없고 말이예요.”
“아니 그럼, 야근이라도 하고 싶다는 말이예요?” 잠자코 반찬그릇을 채우던 부인이
묘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일상적인 오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니지 아니지. 설마 내가 당신을 두고 야근을 하겠어? 일이 많아도 야근은 절대로
안하지! 그럼.”
금새 풀어지는 아내의 표정에 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반찬을 향해
젓가락을 뻗어갔다. 킥킥대는 두 딸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즐겁게만 느껴졌다. ‘이런 집을 두고 어떻게…’ 토끼 같은 자식이라는 말은 이런걸 두고
하는게 아닐까 싶었다.
“소아는 오늘 할아버지랑
시냇가에 놀러갔었지?”
어린 소년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실은 밥상머리에 앉자마자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이 순간을 기다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소아는 아직 반찬이 무엇이 올라왔는지도 잘 몰랐다. 머릿속엔 오로지
낮에 본 버드나무 밖에 없었다.
“소아는 오늘 멋진
친구를 찾았지.”
“친구? 친구를 만났나보구나?”
“아니예요...” 머뭇거리던 소아는 이 얘기가 자뭇 부끄러운 표정을 짓게 만들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먼저 얘기하시는 것 보다는 직접 얘기하는게 더 멋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멋진 친구’ 를
소개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버드나무를 보았어요. 저보다도 작은 녀석이예요. 냇가에서 놀다가 발견했는데 그렇게 잘생긴
나무는 처음봤어요.”
소아는 자신이 생각해낸 가장 멋진 말로 친구를 소개하고 싶었다. 사실 친구라는 것도 할아버지가 말한걸 듣고 나서 깨달은 것이었다. 실은
그게 친구인지, 동생인지, 아니면 아저씨나 아줌마도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멋지다는 말이 최고였다.
“잘생겼어? 어떻게 생겼을까… 아빠도 한 번 보러 가야겠는데?”
“네가 또 순수한
아들내미의 동심을 깨트리려는구나.”
“아버지!”
소아는 자신이 그 나무를 ‘소아’ 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느새 순박한 아빠와 장난꾸러기 할아버지가 한 바탕 난리를 피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마음 속으로만 생각하기로 했다. ‘아직 네가 얼마나 멋진지 모르시는거야. 하지만 난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날 저녁은 정말
맛있었다고 소아는 얘기해주고 싶었다. 냇가에서 달빛을 쬐고 있을 또 다른 소아에게.
이토록 아름다운 하늘이 내 머리위에 있는데
난 바라볼 수 조차 없구나 쓰리도록 눈이 부셔서
너무 아파서 저 하늘을 가질 수가 없어서
혹시 닿을까 팔을 뻗어 보지만 잡히는건 허무, 어둠
눈을 감고 하늘을 그려 맑은 하늘에 구름을 띄워
내 가슴은 저기 있는데, 내 심장이 뛰고 있는데
불어오는 바람에 입김을 실어 내 말을 전해달라고
내 맘을 전해 달라고 이렇게 애원하고 있잖아
지난 밤 내린 비가 마지막이길 기도하고 있잖아
이젠 보여줘 너의 눈 빛나는 태양을 내게 보여줘
두 눈이 멀고 내 가슴이 두근거림을 멈춰도
맑게 개인 하늘을 나 원망할 수는 없으니
아 더는 생각이 안나네 ㅡㅡ;
이거 플로우만 잘 잡으면 괜찮은 랩이 됩니다... 젠장[...]
옛날처럼 좀 있어보이는, 시쳇말로 허영심 가득한 시 나부랭이는 짓지를 못하겠다니깐.
해가 지면 세상엔 그림자가 드리운다. 하늘은 비좁아지고, 고운 금가루가 흩뿌려진다.
바람이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들면 눈 앞에 나타나는 신호등은 파랗게 물든다.
발을 때고, 앞으로 딛었다가 땅을 박차고 흘려보낸다.
온 몸이 둥실대는 듯 울렁거리는 거리는 흑백텔레비전에 나올 법한 광경이고
짓눌린 어깨는 무엇이 그리 무거운지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한다.
옆으로 맨 가방이 떨어질까 두려워 과장되게 한 쪽만 솟아오른 어깨는
지하철에 타고 나서도 내려올 줄을 모르고 뻗뻗하게 굳어있기 마련이다.
책을 펼친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보드라운 종이 위에 그려진 풍경화를 본다.
손으로 짚어가며 향을 느낀다. 갓 마른 듯 촉촉한 잉크 냄새는 그다지 향기롭지 못하다.
내릴 역을 놓칠까봐 이리 저리 눈치를 살핀다. 누군가와 시선이 닿으면 애써 고개를 돌린다.
한 걸음 건너 사람이 빼곡한데도 누구 하나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스스로를 풍선 틈바구니에 서 있는 고슴도치같다고 느낀다. 왠지 모를 불편함.
손 끝을 시리게 하는 바람 조차 반가울 정도로, 지하 공기는 껄끄럽게 느껴진다.
그 곳에서 책을 보듯 길바닥을 쳐다보며 어색하게 땅을 밀치고 나아간다.
괜시리 하늘을 쳐다보기라도 하면 금가루가 떨어져 내 몸을 할퀼 것이다.
이상하게 뒤틀린 오른쪽 어깨가 아파올 때 즈음, 담배를 꺼내 문다.
연기를 뱉어낼 때 만이라도, 내 한 숨은 누군가를 답답하게 만들지 않는다.
어렸을 땐 가슴을 피고 다니면 어른들이 씩씩하다 칭찬을 해주었다.
그래서 난 항상 과장된 몸짓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가슴을 내밀고 걷곤 했었다.
이젠 다 타고 재만 남은 기억들이지만, 아직도 불씨를 기대하며 입김을 불고 있다.
살고자 불어대는 한 숨이 쌓이고 쌓여 다시금 내 영혼에 불꽃을 살릴 수 있기를
그래서, 한 순간이라도 온 몸을 부르르 떨며 환희로 두 눈이 녹아버렸으면 좋겠다.
레코드 판 위로 자욱한 먼지가 리듬을 타며 뿌옇게 안개를 일으킨다. 기계 주제에 꽤나 무리하는 모양이지만, 녀석도 알고 있나보다. 지금 이 음악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쌓인 책들 사이로 세월의 공허함이 줄을 이었다. 그 텅 빈 공간 속으로 비추어 내려오는 야릇한 햇살들이 삐걱거리는 나무바닥 틈새로 스며든다. 햇빛이 만들어내는 날카로운 커튼 속에서는 불꽃의 춤을 따라하려는 먼지바람의 끈질긴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아니, 거의 따라잡았나보다. 먼지로 변해버린 불꽃의 현란한 춤을 보는 듯 사방이 흥얼거리고 이리저리 몸을 흔들어댄다. 이 정도면 꽤나 혼란스러울 만도 하지만 어째서인지 주변은 아늑하고 차분하기만 하다.
눅눅해진 공기가 사방으로 휘몰아치더니 한 순간 어딘가로 빨려나간다. 오랜 세월 기름 한 번 칠해주지 못 해 삐걱거림이 극에 달해버린 낡은 나무 문 사이로 한 남자가 들어온다. 느릿느릿한 걸음걸이와 축 쳐진 어깨는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간 무언가에 대한 동경심마저 일게 한다. 그는 머리를 덮고 있던 모자를 벗어 던지고는 천천히 바닥에 몸을 뉘인다.
"이걸로 된거야."
머리 위로 흩뿌려지는 처참한 한 마디와 함께 날아오르는 작은 반지가 햇빛을 사방으로 반사하여 요란한 광채를 자아낸다. 손가락을 감싸는 쇠붙이는 다소 낡아보이지만 그가 받치는 보석의 발광은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투명하면서도 새하얀 광채는 필히, 그는 자신의 반쪽을 잃었음이 분명하다.
"아아~, 하늘이 코 앞으로 떨어져 내리는구나!"
어째서 저런 정신나간 소리를 하는지 궁금했다. 아니, 어쩌면 일말의 연민이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난 살며시 그의 발 밑으로 미끄러져갔다.
"어이 형씨."
"누가 내게 말을 거는지,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누가 내게 말을 거는지, 신 조차 나를 버렸음에 누가 내게 말을 거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도다!"
"헛소리 말고, 이봐."
"... 누구냐!"
"댁 발밑에 깔려있는 존재라지."
"땅, 바닥이 말을 하는건가!"
"한 마디에 알아들을 수는 없는건가? 난 네 그림자일 뿐이라고. 땅은 말을 못 하거든."
"하, 하하하! 여자 하나 잃고 이렇게 미쳐버릴 수가 있다니, 이제 남은건 죽음 뿐인가!"
"그러다 보면 정말로 죽게 되겠지. 그 전에, 내 질문에 답을 해줘야겠어."
"진중함이 없는 자에게 질문의 답이 무엇인들 어찌 상관하리오, 그 해답 조차도 진중치 못할진데!"
"하나 말해주지. 형씨, 당신은 미치지 않았고, 단지 이별을 겪고 힘든 티 열심히 내려는거잖아. 헛소리 그만 하고, 대답이나 해봐."
"빌어먹을, 질문을 해보게."
"무엇이 그녀를 변하게 했지?"
먼지를 잔뜩 움켜쥐며 꿋꿋히 음악을 뱉어내던 레코드 플레이어는 내 질문에 이어진 적막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멈춰서고 말았다. LP판은 매우 슬퍼할 것이다.
하늘을 수놓는 빛의 물결이 약간의 푸른 색을 띄기 시작할 무렵, 마을의
햄스터들은 모두 쳇바퀴 앞으로 모여들었다. 안 나갈 용기도, 이유도
없었기에 나 또한 그 무리 속에서 호기심에 이끌린 눈빛을 사방으로 발산하였다. 쳇바퀴 앞은 모두에게
공개된 비밀스러운 작업장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잭, 잘 해주었네. 하지만 이것들은 다 필요없게 되었군. 지원자는 한 마리 뿐이니 말일세.”
“쳇, 뭐, 예상은 했었지만. 제스터는
종종 하던 말이, ‘다음 러너는 역시 맨호프 아닙니까?’ 라는걸세. 난 러너인지 어렁러인지 하는건 별로 관심이 안가지만, 적어도 제스터의
마음에 들었다면 어느정도 기량이 보장되어 있다고 볼 수는 있지 않겠나?”
“어쨌든 중요한건
유일한 지원자인 맨호프가 이 자리에서 모두에게 기량을 뽐낼거라는걸세.”
“난 의자나 치워야겠군.”
놀런 경과 현명한 잭은 마치 만담과도 같은 대화를 끝내고는 ‘무대’ 에서 빠져나왔다. 잭은 정말로 앞 발 한 가득 의자를 껴안고 나와서는
‘이런 제기랄, 이렇게 지원자가 없을 줄 누가 알았냐고! 빌어먹을.’ 라면서 의자들을 내 바로 옆의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그의 우람한 몸집은 그의 행동들을 매우 위협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놀라지 말게, 꼬마 친구. 자네는 그저 덩치 큰 늙은이의 신경질을 보게 된 것
뿐이니 말일세. 자, 맨호프의 의식이 시작되니 잘 지켜보게나. 앞으로 자네가 걷게 될 길일지도 모르니 말이네. 오호, 자네 다시 보니 다리도 튼튼하고 몸통이 날렵하면서도 단단하군. 잘만
자라준다면 훌륭한 러너가 될지도 모르겠어.”
“전 러너가 될 수
없을거예요.”
“자신감은 모든 행위의
시발점을 만들어내는 훌륭한 생산자라네. 신께서 내리시는 축복 또한 자신감이 없으면 얻지 못하기 마련일세.”
“자신감이 아니라, 하고 싶지 않아요. 전 러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아하하하, 자네 맘을 모르는건 아니네. 막연한 두려움은 인지하는 모든걸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거든. 물론 이건 지금의 자네로서도 자각하지 못할 테니 너무 신경쓰지 말게. 살아온 날을 더 이상 세기가 힘들어질 정도가 되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니 말일세. 자, 이제 맨호프의 쇼를 지켜보세나.”
젊은 맨호프가 단상 위에 섰다. 현명한 잭도그 옆에 섰다. 둘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는 그들을 주목하는 수많은 군중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맨호프는 이토록 중요한 순간에도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는 표정으로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전 러너로써의 제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제스터가 다시 나타나 저 멈춰있는 쳇바퀴를 돌리는
모습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가 없는 현 상황에서 제가 여러분께 약속드릴 수 있는건, 저 쳇바퀴의 운동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뿐입니다. 저는
누가 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이 안일함에 벌을 내리신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저 맨호프는 제스터의 행방이 묘연한 지금 저 쳇바퀴를 누구보다도
잘 운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전 제스터가 가진 화려한 기술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신께서 허락하셨던 지금까지의 풍요로운 생활도 이어갈 수 있을거라 자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약속 드립니다. 모든건 시작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제가 저 쳇바퀴를 밟고 하늘과 땅을 뒤바꾸고 풍요와 기아를 뒤집어 엎을 수 있도록 하는데 필요한 것은, 약간의 시간과 저의 땀뿐입니다. 여러분께서 인내심을 가지고 절 지켜봐
주신다면, 제 땀으로, 부족하다면 제 피를 흘려서라도 자비로운
신께서 만족하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숙연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아올라 마치 갑작스래 여름철 뜨거운 열기가 몰려오는 듯 했다. 아니, 그 후덥한 공기도 이 보다는 뜨겁지 않다. 지난 여름 겪었던 혹서기의 고통을 떠올릴 틈도 주지 않고 우리들 모두 땅이 울리도록 발을 굴려대며 함성을 질르고
있었다.
“제스터는 최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기예의 달인이었지. 하지만 그는 너무 오랫동안 쳇바퀴에 머물러있었어. 그가 실종된건 어쩌면 하늘의 뜻인지도 모르겠군. 새로운걸 원하시는
걸지도 모르지. 여기 젊은 맨호프가 우리에게, 그리고 신께
흥겨움의 도가니를 보여드린다면 다시 우리가 풍요로워질 기회를 얻을 수 있을게야. 제스터, 좋은 친구였는데 아쉽게 됐군 그래.”
잭의 말에 따라 그 동안 쳇바퀴를 동경하던 수많은 햄스터들이 맨호프를 외치며 연이어 환호했다. 사실, 맨호프는 평소 많은 이들과 친분을 쌓아가며 유능한 젊은이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그는 덩치도 컸고 힘도 셌으며 머리도 좋았다.
마을에서 일이 생기면 모두들 맨호프를 찾기 바빴을 정도였다. 내 보금자리 터를 닦아준 것도
맨호프(그리고 그를 따르는 몇 명의 친구들)였다. 모두들 맨호프의 러너 등극을 환영하는 분위기임이 당연했다.
“부끄럽지만, 저의 시작을 잘 보고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먼 훗날, 오늘을 곱씹으며 웃고 즐길 수 있을 테니까요. 시작합니다!”
활기찬 외침과 함께 그의 거의 반 나절 동안 이어지는 러닝이 시작되었다.
제스터의 실종과 맨호프의 선출은 삽시간에 이루어졌고 평소 그에 대한 신뢰는 이 모든 일들의 여파가 거의
전무하다고 느끼게까지 했다. 하지만 그 소란스러운 파티(맨호프의
첫 러닝)가 끝나고 다음 날인 오늘 아침, 먹이를 얻으러
찾아간 놀런 경의 집에서는 전날 밤의 두근거림이 금방 식어버린 듯 했다.
“놀런 경, 왜 먹이가 이것뿐이죠?”
“무슨 소리인가, 어제 받은 양이랑 거의 비슷한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이 정도 양이라면 저희 부부가 먹기에도 부족하단 말입니다. 거기다
자식 둘까지 있으니 어림도 없죠.”
“하지만 난 언제나
같은 방식의 분류법을 사용한다네. 자네 가정에 배당된 양이 그 정도로 적어졌다면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일
게야.”
“마침 오는 길에
저도 들었습죠. 다들 먹이가 적어졌다고 하던데요? 이거, 러너가 시원찮아서 그러는 거 아닙니까?”
“어허,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러너가 된지 하루도 안된 젊은이라네. 자네 사정도 딱하네만 좀 더 기다려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잖은가?”
“애휴, 알겠습니다. 이만 돌아갈께요.”
한 참이나 끝날 줄을 모르던 실갱이는 결국 서로에게 어떠한 만족도 주지 못한 채 끝나버렸다. 놀런 경은 그 나름대로의 고뇌를 겪고 있는 듯 했고 마을 사람들은 먹이가 줄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하는 표정이었다.
“안녕하세요, 놀런 경.”
“자네 왔는가, 오늘도 또 늦었다네.”
“전 먹이를 그리
많이 먹지 않으니까요. 집에 좀 쌓여있어요.”
“자네, 예전처럼 식사를 거르는건 아니겠지? 또 늙은이 한 숨 쉬게 만들
생각이라면 그래도 좋네만, 자네처럼 한 참 자랄 시기에 먹이를 거르면 나중에 후회하게 되니 될 수 있으면
많이 먹어두는게 좋네.”
“해햇, 지난 번 놀런 경에게 혼난 뒤로는 굶지 않아요. 나름대로 많이 먹는다고
먹는건데 그래도 좀 남네요. 다른 햄스터들에게 절대 주지 말라고 하셔서 결국 쌓여있을 뿐이예요.”
“그렇다면 다행이네만, 먹는 양이 특히 적다는게 이해가 잘 안가는군 그래. 자네는 또래
친구들보다도 몸집도 큰 편일테고 다리에도 근육이 충분히 붙어있는데 말일세. 다행이긴 하지만 이해가 안되는건
어쩔 수 없구먼. 자, 여기 가져가게나.”
“감사합니다, 어르신.”
“어르신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 호칭으로 불리울 때마다 한 살씩을 더 먹는 기분이라네.”
“죄송해요, 놀런 경. 그런데, 먹이가
줄어들었다고 불평하는 햄스터들이 많던데 정말로 그런가요? 전 지금 받아놓고도 잘 모르겠는걸요.”
“안 그래도 오늘
아침부터 그 얘기로 마을이 떠들썩 하다네. 나도 햄스터들의 원성 때문에 골머리가 아플 지경이지. 사실 양이 조금 줄긴 했지만, 아까 그 녀석처럼 그렇게 불평할 정도로
크게 줄지는 않았네. 자네 식사량이면 티도 안 날 정도거든.”
“먹이가 적게 들어오면
러너를 탓해왔으니까요. 예전에 제스터도 그랬고, 러너는 다른
햄스터들보다 먹이를 좀 더 많이 받는 것도 있고요.”
“문제는 마을 전체가
너무 예민해져 있다는 걸세. 시간이 지날수록 맨호프를 원망하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커질텐데, 큰일이로군.”
먹이가 가득 담긴 자루를 짊어지고 문을 나선다. 몇몇 햄스터들이
줄어들은 먹이 양에 대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지금 불만을 토로할 대상을 찾고 있다. 놀런 경은 단지 신의 대리인으로 풍요의 신께서 베푸시는 먹이를 공평하게 분할하는 일을 대행할 뿐이다. 맨호프는 자신들의 믿음 속에서 러너가 되었고 믿음을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들
둘 모두 원망할 수 있을지언정 헐뜯는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신 또한 그 대상이 될 수 있을 리가 없다. 마을 주민들은 그 원망의 화살을 하늘과 땅으로 분산시키며 한 숨을 내뱉는다.
귓가에 들리는 한 숨 소리는 마치 천장이 내려앉을 듯한 기분마저 느끼게 한다.
보금자리로 돌아와서 짐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긴다. 맨호프는
최선을 다 할 것이다. ‘하지만 최선이 전부는 아니야.’ 혀끝에서
씁쓸한 맛이 느껴진다. 매번 밥 생각을 싹 사라지게 만드는 기분 나쁜 맛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딱히 흥미로운 것이 없다. 이러다 잠시 멍해지면
잠들 것이다. 사방에 환한 빛이 가득한데 잠들어 버리는 건 왠지 아쉽다고 생각한다. 역시 먹이를 거르지 않는게 좋겠다.
처음부터 식사를 거르던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난 남들보다 식사를 좀 더 많이 하는 편이었다고 봐야 옳다. 활동량이
많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까닭에 금방 배가 고파지곤 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먹이를
조금씩 남기기 시작했고 그게 여태까지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덕분에 내 주변엔 먹이가 한 가득 이었고
곧 마을 주민들 중 먹이가 부족한 이들이 찾아와 나누어달라고 부탁했었다. 하나 둘 나눠주다 보니 온
마을 햄스터들이 다 우리 집으로 몰려왔고 결국 놀런 경의 호통에 다들 물러갔었다. 그 이후로 햄스터
사이에 먹이를 주고 받는 건 철저히 금지되었다.
쌀알을 두 개 집으려다 문득 맨호프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는
자신이 제스터의 실력을 뛰어넘을 거라 자신하는 것 같았다. – 물론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하지만 그는 햄스터들의 비난이 이렇게
심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제스터가 그랬던 것처럼 신의 축복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맨호프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이겨낼 수 있을까? 만일 그게
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내가 러너가 되어 그런 비난을 받게 된다면 금방이라도 그만둘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맨호프는 그 누구보다도 러너로써 적격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단독으로 지원해 러너가
되었고 마을 햄스터들이 다 모인 가운데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으니 더 이상 빠져나갈 방법이 없게 되었다. 물론, 그가 가진 신념이 러너를 그만두는 행위 따위를 인정할 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게
바로, 마을의 해결사이자 젊은 일꾼 “젊은 맨호프” 이니까.
잡 생각은 입 안의 쓴 맛을 잊게 해준다. 어렵사리 식사를
끝내고 불러오는 배를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늘 받아온 먹이의 반 정도를 먹어 치웠다. 이제, 남은 쌀알을 땅 밑에 묻어놓는 일만 남았다.
내 보금자리는 마을의 가장 구석, ‘세상의 끝’ 이라 불리우는 벽과 붙어있다. 그리고 내 먹이는 그 벽과 붙어있는
땅 밑을 파내다 보면 나오는 커다란 포대에 담겨있다. 난 먹이가 남을 때마다 이 포대에 담아 다시 땅
밑으로 묻는다. 너무 깊게 파면 꺼내기가 힘드니, 단지 포대자루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발 밑의 톱밥을 적당히 차내고 나면 저 멀리 보이는 세상의
끝 저편은 그 누구도 제대로 된 언급을 하려 하지 않는 신비의 땅이다. 심지어 놀런 경에게 물어봐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알려 하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 되는 재미없는 반응에 더 물어볼
기운마저도 빠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뒷 발로는 잘 되지 않아 앞 발로 천천히 파내기 시작한다. 이전부터
항상 느끼는거지만 톱밥을 걷어내는건 뒷 발, 흙을 퍼내는건 앞 발이 더 쉽다. 특히 흙을 퍼낼 때 뒷 발로 괜히 무리하다가는 다리를 다치기 쉽상이고, 앞
발로 파더라도 너무 급하게 하면 손톱이 다 찢어져나간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조금씩 파내는게 유일한 방법이다. 이런 이유로 최대한 얕게 묻어놓으려 했던건데, 포대자루를 꺼내 펼쳐본 지금 난 이 모든걸 후회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없어, 하나도 없어…”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신음에 온 몸이 반응한 것 같다. 부들부들
떨리는 것으로 모잘라 나도 모르게 땅을 더 파야 한다며 끙끙거리고 있는 것이다. 흙이 핏물에 엉켜 뭉쳐지는걸
발견하고 나서야 제 정신을 차리고는 천천히 흙을 좀 더 파내본다. 약간 더 깊이 파 보아도 딱히 발견되는건
없다. 분명 식량은 누군가에게 도둑맞은 것이다. 소유물을
빼앗는 행위, 도둑질, 절도, 범죄. 나를 향한 무분별한 악의.
손실이라는 두 글자로 나타나는 결론이 내 모든 기분을 설명하진 못한다. 정신없이 흐트려놓은
톱밥들이 스산한 기운마저 느끼게 한다. 누군가 내가 모르는 사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가 먹이가 있는 곳을
찾아내서 톱밥과 흙을 파내고 그 속의 식량을 빼낸 다음 다시 원래대로 흙과 톱밥을 묻어놓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 뭔가 굉장히 기분이 안 좋아지는 일이다.
이는 분명 ‘억울함’ 일
것이다. 내가 아직 어려서인지 순간적으로 느끼는 감정들을 뭐라 불러야 할 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분명 이는 ‘억울함’ 이다. 가슴이 답답하고, 무언가 손해를 본 듯한 기분이 느껴지는 – 실제로 손해를 본거지만 말이다. – 감정. 단지, 잊는 것 밖에는 달리 해소될 수 없는 불안정함. 난 참 지독한 녀석에게 걸려든 것 같다.
무언가를 잊는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오랜 시간의 힘을 빌리면
가볍게 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바로 어깨를 스쳐 지나간 등 뒤의 시간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지우려
함은 결코 쉽게 느껴지지 않는다. 더욱이 그것이 자기기만의 속성을 띄고 있다면 말이다.
무거워진 턱을 들어올리고 등뼈를 곧게 펴 일어섰다가, 다시
드러눕는다. 어찌 보면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식량을 제외하고는
건드린 흔적도 없고, 내게 드러낸 악의 라고 해봤자 단지 배고픔의 일환인 것이다. 내 손을 거쳐 주어지던 본의 아니게 절도를 당하던 결국 내겐 필요 없는 것들이었고 오히려 안 그래도 좁은 집을
더 좁게 만드는 요인이 사라진 셈이니 좋아할 일일 수도 있다. 비록 다소 찝찝하고 씁쓸한 기분이긴 하지만, 이제 와서 변하는건 없다. 물론 이 일을 놀런 경에게 알려서 범인을
색출하고 증거와 목격자를 수습해서 사건을 일단락 지을 수도 있다. 피해자가 있으니 가해자도 나타날 것이고
이 마을의 누군가는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난 이 모든걸 원치 않는다. 가혹한 형벌도, 어수선한 마을 분위기 – 러너의 교체로 인해 생긴 불안감에 더해 – 도 싫다. 법 없이 산다는게 무엇인지를 생각하는건 무리일까? 이러한 질문 조차도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따스한 햇살에 기대어, 잠시간 생겨났던 굴욕과 분노의 감정을 녹여낸다. 아직 오전이니 조금은 거닐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지만, 방금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금의 상황은 내게 집에서의 휴식 – 그리고 감시 - 을
권하고 있었다.
밤 하늘이 시커멓고 달빛이 노오랗고 늦가을 공기가 차갑고 잠은 오지 않고
이런 무념무상한 단어만 잔뜩 뱉다가 순간 찾아온 고독감에 한 숨을 내쉬면
마치 눈 앞에서 큰 강이 흘러가는 듯이 코 끝으로 말미암아 느껴지는 찌릿함
아름다운 무언가에 황홀해지는 기분, 하지만 손 댈 수 없을 것 같다는 당혹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쳐다보고만 있다가 불현듯 강물을 다시 보니 하늘이 있었다.
밤하늘은 시커멓고 달빛은 노오랗고 구름은 보이질 않는 매정한 세상에
뻥 뚫린 어둠이 흐르는 거대한 강과 내 숨에 물들어 허옇게 피어나는 꽃잎이
가슴 속으로 스며들어 날 아프게 하고 짓누르고 차갑게 식혀 죽여가는데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휘젓다가도 흘러가는 네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함에
잿빛으로 흘러가는 잔잔한 가곡들이 귓가를 스쳐가다 하늘로 솟아오른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고 내 숨이 건조해 입술이 타고 목이 매마르는 밤에도
네 시선이 향하는 표독스런 표정은 변할 줄을 모르니 그저 이리저리 서성일 뿐
그저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애려오는 풍경에 입을 열지 못 하고 그대로 서서
손 끝 하나 뻗지 못 하고 단지 아름다웠다 라고 생각할 뿐인 것을 어찌하겠냐만은
이 모든게 결국 내 원하던 모든 것임을 깨달아버리고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의미부여에 대한 여지는 남기지 않고, 단지 가슴 속에 있는 무언가를 풀어 써내고 나면 이상하게 침착해지는 기분이라, 사실 이게 이 블로그의 존재 의의이다.
싸이월드를 굳이 탈퇴한건, 내 마음의 창이 두 개인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블로그 하나도 신경쓰기 벅찬데 싸이월드까지 매달리게 되면 내가 너무 힘들어질 것 같아서였다.
힘들어진다는 것에는 수많은 의미가 있지만, 단지 보기만 해도 힘들고 열받고 짜증이 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을 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요즘 이를 망각하고 있었는데, 다시 깨달아서 미루어왔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걸 나도 잘 안다. 밤 하늘이 아름답고 달빛이 소름끼치도록 사랑스러울 지경에 오게 되면 난 이것이 밤 하늘을 보는 이의 탓인지, 아니면 밤 하늘이 아름다운 것에 죄를 물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혼란을 느낀다. 아름다움엔 죄가 없지만 이를 보는 나그네의 가슴은 찢어발겨지는 것이다. 달빛에 취하기엔 내일의 태양이 만만치 않기 때문임을 나는 변명하지 않는다. 다만 눈을 감고 잠을 청할 뿐..
이따금씩 나를 위한 태양의 존재를 잊고 달빛과 별 흐름에 매료되어 잠 들지 못 하는 밤을 맞이하게 되면, 그저 그 아늑한 향취 속에서 내 스스로를 잃지 않기를 잠시나마 바래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