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는 수많은 수식어들이 붙는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라는 평도 있고
권위의 카프카 상(노벨문학상을 향한 길목이라는 표현도 빠지지 않는다.)을 탄 책이다, 라는 것도 있다.
하루키의 평생의 역작이라는 말이 가장 흔할 것이다. 확실한건, 나는 그런 수식어 따위의 간접적 시너지 효과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 '하루키 문학의 정수' 라 불리우는 해변의 카프카라는 책에 상당한 감성적 영향을 받아버렸다는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감동적이라고 하겠지만 휴머니즘 다큐멘터리 따위를 보면서 느낄만한 잔잔한 파도따위가 아니다. 말을 빌리자면, 난 책을 읽는 내내 다무라 카프카가 되어 하늘을 날아다니고, 또 모래폭풍을 만나 그 속에서 살점이 뜯겨져 나가는 고통을 느껴버렸다. 그리고 찾아온 해변 속에서 내 안의 '사에키씨' 를 찾아 해메인 것은 물론이다. 난 카프카가 되었고 그는 내가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상/하 권으로 나뉜 해변의 카프카의 상권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도 '하루키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적절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의도라는 것을 완벽하게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해박한 인문학 지식이 오시마라는 캐릭터를 빌어 쏟아져 나오기라도 하면 상당히 긴장한 채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앞으로 내가 써 내려갈 상징적인 개체에 대한 해석이나 이야기 구조에 대한 전반적인 해설도 몇몇 부분은 '나에 의한 주관적 해석' 에 지나지 않아서 이 책을 읽은 다른 독자들이 이 글을 보더라도 수긍하지 못할 염려가 있지만 사실 이는 그리 신경 쓸 부분은 아닐 것이다. - 두 권 분량의 장편소설(그것도 하루키의)을 보잘 것 없는 내 필력으로 축소,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덕분에, 차후 이 기록이 내게 미칠 긍정적 파동을 고려하여 질답형식으로 해변의 카프카의 전체적인 뼈대를 훑어갈 수 있는 기회를 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Q. 왜 '카프카' 인가?
A. 작 중 카프카 라는 이름은 여러군데에서 등장한다. 주인공의 이름은 다무라 카프카(물론 가명이지만), 사에키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그림의 제목과 그녀가 19세때 낸 음반의 타이틀 곡 제목 모두 '해변의 카프카'. 주인공의 조언자 역할은 까마귀 소년이 하고 있다. - 카프카(Kafka)는 체코어로 '까마귀' 이다. 작 중 등장하는 수 많은 메타포들 중에서도 몇몇은 까마귀를 표현하고 있는데, 역설적으로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구심점을 놓고 돌아가는 모양이 마치 태양계와도 같다. 이것이 어떤 독립된 단일명사로써의 기능을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프란츠 카프카라는 작가의 존재도 떠올릴 수 있으나 작 중에서는 큰 의미는 없다. 중요한건 다무라 카프카는 해변의 카프카에 이끌리며 까마귀 소년의 조언을 받아내기도 하는 등 서로간의 관계는 분명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하루키는 '현세와 이계', '생전과 사후', '알 내부에서 알 외부로', '현실에서 꿈속으로', 혹은 그 반대로의 여행을 끊임없이 이어감과 그리고 도착하는 바다(쉼터, 안식처)... 하루키는 이 여행에 지친 존재를 한 마리의 까마귀로써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Q. 까마귀 소년은 누구인가?
A. 까마귀 소년은 이 작품 첫 장부터 등장하는데, 시종일관 다무라 카프카 군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아버지의 저주와도 같은 예언을 거부하고자 가출을 결심하는 주인공에게 '현실적인 문제점' 을 제시하여 가출이라는 행위 자체를 부정적으로 여기는가 하면, 어려운 길을 선택한 그에게 운명이라는 이름의 모래폭풍을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필요할 땐 보이지 않기도 한다.
이렇게 실제하는 듯 하면서도 비현실적인 '까마귀' 에 대한 정의는 다시 한 번 프로이트의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 도덕적 양심으로 무의식의 끊임없는 폭주를 잠재우려는 '초자아' 의 존재는 어느 면에서 보든간에 까마귀 소년과 매우 닮아있다. - 물론 이런 학설에 고착화시켜 까마귀소년 = 초자아 라는 등식을 성립시킬 필요는 없다. 오히려, 까마귀 소년은 다무라 카프카를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15살 소년' 으로 만들어주는 조력자이며, 하루키의 상상력에 의해 탄생된 초자아의 오마쥬이자 메타포로써 그 기능을 충실히 이행했다고 볼 수 있다.
"넌 꿈에서도 그러면 안되는 거였어." - 사쿠라와의 관계를 꿈에서 해버린 다무라군을 까마귀소년이 질책하는 대목.
Q. 왜 다무라 카프카는 가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일까?
A. 다무라 카프카는 도쿄의 도심에서 살아왔고 가출을 결심한 후 도달한 곳이 바로 시코쿠이다. 작품의 커다란 맥락에서 볼 수 있는 은유적 상징물의 하나로써, 도쿄는 현세이며 시코쿠는 꿈 속이라고 할 수 있다. 다무라 카프카는 현실에서 아버지의 예언 -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누이를 취함 - 에 의해 큰 충격을 받는데 이는 아버지의 저주라기 보다는 무의식속에 잠재되어있던 욕구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의 일환으로 볼 수 있으며 그에 대한 방어기재로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현실에 대한 도주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작 중 오시마의 메모엔 이런 내용이 있다. - 아돌프 아이히만 이라는 자에 대한 책을 읽고 쓴 것인데, "모든 것은 상상력의 문제이다... ~ 상상력이 없는 곳에 책임은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무라 카프카는 꿈 속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실제로 아버지가 살해당했다는 뉴스 보도를 듣게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누가 그 꿈의 소유자이든, 너는 그 꿈을 공유했다. 그러니까 그 꿈 속에서 행해진 일에 대해 너는 책임을 져야 한다. 결국 그 꿈은 네 영혼의 어두운 통로를 통해서 들어온 것이니까."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는 열망은 강했으나 이를 실제로 겪고 나니 죄책감에 사로잡힌 것이다. 덕분에 그는 고향(현실)으로 돌아갈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생겨버리고 말았다.
Q. 고무라 도서관이 갖는 메타포적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A. 다무라가 고무라 도서관까지 도달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거의 우연의 연속이자 운명적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다무라 카프카 자신이 찾던 지상의 낙원이 바로 이곳을 뜻하는데, 쉽게 말하자면 책을 마음것 읽을 수 있고, 숙식이 제공되며, 자신을 도쿄의 본가로 돌려보내려는 손길도 없다. 친절한 오시마군과 사에키씨가 있고 해변의 카프카가 있는 그곳은 다무라에게 '가장 완벽한 장소' 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도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하고 긴 시간동안 오시마군의 통나무 집으로 피신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고무라 도서관은 다무라 카프카의 자아가 직접적으로 성장하는 일련의 과정들 중 가장 안식에 가까운 시간들이 허락된 곳이자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예언을 피해다니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히게 되는 장소이다. 다무라 카프카는 이곳을 일종의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 정도로 여기게 되지만 결국 그 믿음도 깨어지고 다시 한 번 나약해진 자신을 다잡게 되는 계기를 얻게 된 것이다.
Q. 사에키와 해변의 카프카는 다무라 카프카에게 무엇이었나?
A. 다무라 카프카의 '꿈으로의 여행' 이라 말할 수 있는 실질적인 가출기간 동안의 발자취에서 최후의 종착역이라고 할 수 있는 고무라 도서관에 그 모든 것이 있었다. 결국 다무라 카프카가 그 도서관에 등장하면서 평온했던 일상의 우윳빛 안개는 모두 걷혀버렸다. 해변의 카프카는 자신을 이해하는 또 다른 존재를 받아들였고 사에키는 죽은 애인의 존재로 인해 "끝" 을 기다리다가 결국 다무라 카프카를 받아들이고 자신이 기다리던 것을 찾는다. 다무라 카프카는 자신의 선택과 운명의 선택 사이에서 진실을 찾지 못 해 혼란을 겪지만 스스로의 선택으로 사에키와 관계를 맺고 그 행위가 자신의 가설 속에서 아버지의 예언을 실현시킨 것을 깨닫게 된다. 다무라 카프카는 해변의 카프카라는 그림 속의 소년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고 이는 잘못된 욕망의 투시라고도 볼 만 하지만 그는 이를 거부한다. 다시 말해 해변의 카프카(음악이던, 그림이던간에)와 사에키는 다무라 카프카로 하여금 운명(아버지의 예언)을 피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견뎌내도록 유도하는 매개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까마귀 소년이 모래폭풍을 '피하지 않고 버텨야 할 것' 이라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Q. "텅빈 사람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A. "텅빈 사람들" 가장 뚜렷한 예시는 고무라 도서관에 찾아온 여성협회 감사관들이다. 침묵과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오토바이 헤드라이트처럼 불쑥 튀어나온 그들은 여성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아래 원칙주의를 고수하며 이것 저것 트집을 잡고 따져대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오히려 역차별적인 점도 있거니와 오시마의 반박에 휘둘려 '원칙주의' 라는 본래의 주장을 번복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결국 오시마가 자신이 여성임을 밝히면서 그들은 꼬리를 내리고 도망친다. 오시마는 이들을 '속이 텅 빈 사람들' 이라고 부르며 경멸한다. (정확히는 공허한 사람들이라고 일컫는다.)
이것은 어쩌면 다소 이데올로기적 관점일 가능성도 있고, 정치/사회적 비판의 징후가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내 시각에서 파악된 하루키의 '텅 빈 사람' 이란, 작은 것 때문에 큰 것을 못보는, 명분에 의해 실제하는 문제를 조명하지 못하는, 즉 정작 중요한게 뭔지 모르는 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비관용성, 독불장군같은 계급 투쟁의 운동방침, 공허한 말들, 찬탈된 이상, 경직된 시스템."
공허한 인간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심각하게 몰두하지만 사실 그런건 수정의 여지가 있고 용서와 관용으로 되풀이를 막을 수가 있다. 하지만 비관용적이고 편협적인 사고방식 - 예를 들면, 사에키의 옛 애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운동권 학생들처럼 - 으로 똘똘 뭉친 이들에게, 진정 중요한게 무엇인지는 큰 문제가 아니다. 무엇이든 그 기조가 바뀌게 되더라도, 상상력의 결여 때문에 곧잘 무의미한 말들을 쏟아내게 되는 것이다.
공허한 이들은 우리 주변에도 많이 볼 수 있다. 제대로 된 신념없이 되는데로 지껄이면서도, 그 흔한 관용과 용서는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하루키가 이 '공허한 사람들' 을 등장시킨 것은 15세의 터프한 소년이 만나게 되는 수 많은 난관들이 이 '공허한 사람들' 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Q. 입구의 돌은 무엇일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잿빛도시의 의미는?
A. 입구의 돌이 처음 언급되는 곳은 바로 '해변의 카프카' 라는 노래의 노랫말이다. 다무라 카프카 군에게 있어 입구의 돌 자체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저 통나무 집에서 지내는 동안 조금씩 탐험했던 미궁의 숲 속에 입구의 돌로써 열리게 되는 통로가 존재했다는 연관성 정도이다. 미궁의 숲이 가지는 의미와 그 속에서 들어갈 수 있었던 잿빛도시의 모습은 다무라 카프카의 의식의 심연 속에서 자리잡은 유아의 기억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위해 매일 찾아와 집안 살림을 챙겨주는 사에키의 15세 시절 모습이나 충분한 식료품이 주어지고 아무도 자신을 해하지 못하는 장소라는 믿음 등에서, 만일 다무라 카프카가 그 곳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면 영원히 나약한 소년 카프카로써 머무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등장한 현세의 사에키의 회유로 다무라 카프카는 잿빛도시를 빠져나와 오두막집으로 돌아갔다. 영원히 유아기의 아늑하고 평온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카프카는 잿빛도시를 빠져나옴으로 해서 진정 '가장 터프한 15세 소년' 이 될 수 있었다.
Q. 다무라 카프카에게 있어 아버지와 어머니(사에키)의 죽음은 어떤 의미였을까?
A. 아버지의 죽음은 다무라 카프카가 "상상력과 책임의 관계" 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꿈 속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꿈에서 깬 직후 가슴 언저리에 묻어있는 상당량의 피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 사건은 카프카에게 큰 추격과 혼란을 가져다 주게 된다. 바라던 것이라 믿었으나 그것이 실현되고 또 자신의 꿈 속에서 가해자가 자신이었다는 사실은 본능적인 욕구와 초자아(까마귀 소년이 아닌 순수 초자아)의 충돌로 심리적 엔트로피 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상상력이 없으면 책임도 없는 것이 아니냐 라는 오시마군의 메모내용대로라면 상당한 죄책감이 필연적으로 따라왔을 것이다.
더군다나 다무라 카프카 스스로는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 라고 여기지만 이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증오의 표시로 여기는 것이 옳다. 자신의 입으로 "지금 아버지를 내 손으로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라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시도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스스로 죽고 싶어했는데 말이다. -> 나카타 노인과 '조니 워커' 의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반면 사에키의 죽음은 다무라 카프카에게는 하나의 '변화' 라고 할 수 있다. 영원히 어머니(잿빛도시에서 사에키는 그녀 자신이 다무라 카프카의 어머니임을 부정하지 않는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 위기에 처했던 그를 다시 현세로 돌려 보낸 것이 바로 그녀였다. 작가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진정 부모님의 곁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찾아오면 우리는 고독한 마음을 간직하며 새로히 태어난다. 그것이 바로 성인이 되는 길목의 모습이다." 라고 말이다.
사에키가 정말로 다무라 카프카의 어머니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 잿빛도시 자체가 다무라 카프카의 무의식 내부를 실체화 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건 사에키의 죽음과 동시에 다무라 카프카의 정처없는 여행도 끝났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흔적을 뒤쫓는 무의미한 발걸음.
중간중간에 삽입된 나카타 어르신과 호시노 군의 이야기는 다무라 카프카의 이야기와 맞물리는 듯 하면서도 뭔가 연관성이 없어보이기도 한다. 몇 가지를 공유하는 것은 물론이다. 다무라 카프카의 아버지를 '실제로' 죽인 것은 바로 나카타 노인이다. 그는 다무라씨(카프카 군의 아버지)를 고양이 살해범이라고 생각하며 조니 워커라고 부른다. 정확한 이유나 목적은 없지만 조니 워커를 죽인 후 난데없는 히치하이킹을 시작하더니 다무라 카프카가 있는 곳인 '시코쿠' 로 가버린다. 도쿄와 시코쿠가 '현실과 꿈' 으로 각각 대응이 가능하고 나카타 노인이 "시코쿠로 가기 위해서는 큰 다리를 건너야만 합니다" 라고 말했던 것은 현실 속의 그 거대한, 섬과 섬을 잇는 다리가 '꿈과 현실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를 건너게 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것이 하역운반업을 하고 있는 20대 청년 호시노 군이다. 그 역시 나카타 노인을 대면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노인의 예의바름, 성실함, 순진무구함에 매료되어 무엇이든 도와주지 못해 안달이다. 자신의 할아버지를 닮은 나카타의 '입구의 돌' 을 찾고 이를 열어내는 일까지 모두 돕고는 그의 죽음까지 곁에서 지켜보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호시노는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되어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 기쁨을 누린다. 나카타와 호시노의 이야기는 다무라 카프카의 이야기와 많은 부분이 맞물려 있고 나카타가 입구의 돌을 통해 연 '입구' 로 다무라 카프카가 들어가 잿빛도시로 들어서게 되는 등 두 이야기는 서로 상호작용하며 스토리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 오묘한 구조의 전개가 가지는 의미는, 현재의 나로써는 정확한 뜻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 누가 설명좀...;;
나카타 노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학교 야산에서 야외실습을 하다가 집단 실신사건을 겪게 되고 오랜 시간동안 깨어나지 못하다가 결국 일어난 후 기억을 잃고 글쓰기, 읽기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다.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난 듯 보이지만 그의 시점에서 바라본 세상은 한 없이 즐겁고 행복할 뿐이다. 그에게 있어 시간의 흐름이란 무의미할 뿐이며 하루 종일 한 자리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려도 지루함을 느끼긴 커녕 안정감까지 느끼며 편안히 지낸다. 유복하고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한 행복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조니 워커를 살해하게 되고 - 본인의 청탁을 받았으니 자살과 마찬가지이지만 - 비로소 '남들처럼 똑똑해졌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품게 된다. 동시에 갑작스런 여행을 떠나게 되고...
나카타 노인의 이야기는 메타포적 의미부여가 굉장히 까다로운 난해함이 있지만, 읽다 보면 그 자체로 훈훈해지는 감동의 미학이 숨어있다. 이제 초독을 끝낸 것 뿐이니 다시 한 번 읽어서 완전히 독파하게 되면 이 난해함을 오묘한 매력으로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